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4세 (문단 편집) === 친정 초반, 여러 개혁을 실시하다.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www.historytoday.com/Louis-xiv.jpg|width=100%]]}}} || || [[1661년]]의 루이 14세 || 루이 14세는 프롱드로 초토화된 프랑스를 물려받았다.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만들어 놓은 [[절대왕정]]을 물려받기는커녕 그들의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프롱드를 유발시켰고, 왕권을 약화시켰다.[* David Parrott, 1652(2020)] 결국 루이 14세는 처음부터 다시 [[왕권]]을 세우고 프랑스를 복구해야 했다. [[워커홀릭]]이었던 루이 14세는 하루에 6시간 이상 일했는데 우선 국무회의를 자신의 뜻에 따라 개최하면서 권력을 집중시켰고 여러 재정, 행정 [[개혁]][* [[장바티스트 콜베르]]가 담당했다.]을 단행하였다. 그 중에 루이 14세는 군제 개혁을 가장 중요시했다. 르텔리에 부자(父子)[* 아버지 르텔리에와 아들인 루부아 후작]는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. 흔히 "[[프랑스군]]이 [[30년 전쟁]] 시기에 강했다."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오로지 [[기병]]에만 해당되었다. '''프랑스 [[보병]]은 유럽에서 최악의 병사로 유명했다.'''[* David Parrott, The Business of War(2012)] 루부아 후작은 프랑스의 보병을 유럽 최고로 만들었고, 기병은 30년 전쟁 시기의 명성 이상으로 강해지게 하였으며 프랑스군을 40만까지 증가시켜 유럽 최강의 군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. 이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[[왕권]]은 엄청나게 강해졌고 프랑스는 프롱드의 상처를 회복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